주식 투자를 할 때는 모르면 SPY, QQQ 사서 묻어둬라라고 동료들에게 훈수를 두곤 했습니다.
하지만 정작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쇼핑인 아파트 매수 앞에서는 저 역시 갓 걸음마를 떼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더군요.
첫 아파트 매매 계약을 진행하며 겪었던, 얼굴 화끈거리는 실수와 그 과정에서 배운 수백만 원짜리 인생 수업을 공유해 보려 합니다.
혹시 저처럼 전세나 월세 살이에 익숙해져 있다가 처음 매매를 준비하는 분들이라면, 이 글이 값비싼 수업료를 아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.
가계약금은 그냥 찜해두는 비용 아닌가?
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습니다. 놓치기 싫은 마음에 부동산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수백만 원을 먼저 입금했습니다.
흔히 말하는 가계약금이었죠.
이 돈을 단순히 물건을 잡아두는 홀딩(Holding) 비용 혹은 우선 협상권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습니다. 일단 찜해놓고, 나중에 조건이 안 맞으면 돌려받거나 협의하면 되겠지?라고 말이죠.
이것이 저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착각이었습니다.
가계약금을 넣은 후, 저는 매도인(집주인)에게 문자로 여러 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습니다.
거실 시스템 에어컨 설치할 거니까 기존 2in1 에어컨 철거해 주세요. 인덕션 싫고 가스불 쓸 거니까, 인덕션 떼고 원래 가스 쿡탑으로 원상복구 해주세요. 식기세척기 안 써요. 떼어가시고 싱크대 수납장 다시 짜 넣어 주세요. 안방 천장에 있는 목각 인테리어, 너무 정신 사나우니까 철거해 주세요.
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거워지지만, 그때는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. 왜냐고요?
평생을 세입자로 살았으니까요.
전세나 월세로 들어갈 때는 도배나 장판, 고장 난 시설물에 대해 임대인에게 요구하는 게 당연했습니다.
그 관성 그대로 매매 시장에 들어온 겁니다. 내가 몇억 넘는 돈을 주고 사는데,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?라는 보상심리도 있었고요.
부동산과 매도인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. 돌아온 답변은 철거 의무 없음. 꼬우면 잔금 치르고 네가 알아서 하세요였습니다.
심지어 중개사님은 이미 가계약금 넣을 때 현 시설 상태에서의 계약이라는 문자를 받으셨고 입금하셨으니, 이건 본계약과 효력이 같습니다.
지금 와서 조건 변경을 요구하다 계약을 깨면 수백만 원은 포기하셔야 합니다라고 못 박더군요.
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. 단순히 찜했다고 생각한 수백만 원이, 사실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해약금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겁니다.
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.
부동산 매매 시장은 서비스업이 아니라 권리 양도의 시장이라는 점입니다.
- 세입자 마인드: 집주인님, 여기 고쳐주세요.(O) -> 임대인은 사용 수익을 가능하게 해 줄 의무가 있음.
- 매수자 마인드: 매도인님, 여기 고쳐주세요.(X) -> 매도인은 소유권을 넘기는 것이지, 내 입맛에 맞게 인테리어를 해 줄 의무가 없음.
보통 아파트 매매는 현황 매매가 원칙입니다. 누수 같은 중대한 하자가 아니라면, 낡은 싱크대, 보기 싫은 인테리어, 쓰던 가전제품의 철거 유무 등은 모두 매수자가 잔금을 치른 후 내 돈으로, 내 취향대로 고치는 것이 룰이었습니다.
시장에서 통용되는 철거의 범위는 보통 이사 갈 때 가져갈 수 있는 가전(에어컨 등) 정도지, 붙박이장이나 인테리어 시설물은 매수자가 떠안고 고치는 게 일반적이더군요.
결국 저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.
- 자존심을 세우며 500만 원을 포기하고 계약을 엎는다.(법적으로 배액 배상이니 뭐니 복잡해질 수도 있음)
- 깨끗하게 내 무지를 인정하고, 잔금 후 내 돈으로 철거하고 예쁘게 꾸민다.
저는 2번을 택하기로 했습니다.

가계약금을 입금하는 순간, 그 돈은 더 이상 내 주머니 속의 쌈짓돈이 아닙니다. 이 상태 그대로 이 가격에 사겠습니다라는 강력한 법적 약속입니다.
딱 3가지만 기억하세요.
가계약금은 ‘찜비’가 아닙니다.
입금 전 문자 내용(특약)을 꼼꼼히 확인하고, 요구사항(수리, 철거 등)은 반드시 입금 전에 조율해서 문자에 남겨야 합니다. 돈 들어가면 을이 됩니다.
매매는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.

전세 살던 때처럼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구하지 마세요. 이제 곧 당신이 집주인입니다. 수리비까지 감안해서 매수 예산을 짜야 합니다.
인테리어 철거 비용은 생각보다 쌉니다.
매도인과 감정 싸움하느라 좋은 매물 놓치지 마세요. 철거? 폐기물 스티커 몇 장이면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.
부동산이라는 낯선 정글, 전세 마인드는 버리고 소유주 마인드를 장착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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